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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01 아침의 문 - 박민규(2회)
  2. 2010.02.28 아침의 문 - 박민규(1회)
하루를 넘게 자긴 했는데, 어이가 없을 정도로 눈이 번쩍 뜨였다. 어둠 속이었고, 마비된 몸속 가득 눈이 쌓여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눈들이 녹아내렸다. 실패... 였다. 살아, 괴로운 몸을 일으킨 것은 마침 아침이었다. 변기까지 기어가 몇 번이고 토를 했고, 기어와 다시 한나절을 잤다는 생각이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손을 뻗어 짚어본 JD의 이마는 얼어붙은 눈사람처럼 차갑고 서늘했다. 두 명의 여자아이도 마찬가지였다. 모르겠다. 우선은 비스킷을 먹는 일에, 남은 우유를 먹는 일에 집중하고자 한다. 비스킷의 맛을 비로소 나는 느끼게 된다. 굳이 그 맛을 말해야 한다면 짜다, 라고 말하고 싶다.

 다들 카페에서 만난 사이였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란 카페였고 처음엔 JD와 나 둘만의 공간이었다. 하나 둘 늘어난 회원의 수가 어느새 스무명을 넘게 되었다. 몰랐다. 자살을 원하는 인간들이 그토록 많을 줄은 정말 몰랐다. JD는 좋은 리더였고, 유능한 리더였다. 그런데 뭐가 문제였을까? 마지막 남은 비스킷을 털어넣고는 나는 자리를 일어선다. JD에게 불만은 없다. 수면제니 무슨 유도제니... 식단을 짜기 위해 두 차례나 상하이를 다녀온 JD였다. 아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실은 말도 못하게 희귀한 특수 체질이거나... 아니면 바로

 재수가 없었다는 것.

 늘 그랬다. 재수도... 재주도 없었던 인생... 텅 빈 우유팩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는 담배를 주문한다. 그리고 또... 순간접착제를 산다. 괜찮으세요? 거스름돈을 건네주며 여직원이 물었다. 뭐가... 요? 아까 저기서 토했잖아요. 아, 그거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신기하다. 남에게 관심을 가지는 인간이 다 있다니. 언제부터 인간이 남에게 관심을 가졌다고 이러는 걸까. 묘하게 살찐, 눈앞의 인간을 향해 나는 싱긋이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준다.

 제가 치우고 갈게요.
 나는 말한다.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구요.
 놀란 얼굴로 그녀가 답한다.

 그뿐이다.

 여전히 밤공기는 차고, 늙은 가등 하나가 문학작품이라도 집필하는 자세로 꼼짝 않고 서 있다. 세 구의 시신을 확인하고도 별다른 감정의 기복을 느끼지 않았다. 애당초 정해진 일이었고, 오층 옥탑방을 스치는 전파의 수만큼이나 나는 다른, 경우의 수를 생각했었다. JD는 여러모로 이론에 밝은 사람이었다. 실패할 확률이 의외로 높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그리고 생일 축하해. 언젠가 그런 쪽지를 보내온 적도 있었다. 생일 축하해, 삶을 인정하는 JD의 그런 태도를 나는 무엇보다 높이 샀었다. 절대 믿어선 안 될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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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문 - 박민규(1회)  (0) 2010.02.28
Posted by 줄탁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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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서]

모택동은 말했다.

혁명은 결코 우아함과 예의 따위와는 어울릴 수 없는 것이라고. 모택동이 누군지는 몰라도 순간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패션 레볼루션[JUNK]. 광고 하단에 찍힌 브랜드 옆에는 분명 모택동으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이 로고처럼 박혀 있다. 산 사람일까, 아니면 죽은 사람일까... 어쨌거나 그는 유명한 인간일 것이다.

광고의 메인엔 머리를 빡빡 민 여자가 서 있다. 버튼 두 개를 풀어헤친 청바지가 의상의 전부이고, 하얀 아랫배와 조그만 배꼽... 기다란 여체의 라인을 따라 깨알 같은 모毛의 말들이 줄줄이 적혀 있다. 혁명이란 사교모임의 만찬이나 문학작품을 집필하는 것, 또는 회화를 그리거나 자수를 놓는 것이 아니다. 혁명은 그 자체가 바로 폭력적인 행동이다. 그렇군, 하고 나는 중얼거린다. 어쩌면 모는 이 청바지회사의 설립자일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저, KFC의 영감 같은.

그렇다 치자.

아니, 당신 말이 맞아. 무릎 위에 잡지를 내려놓고도 나는 한동안 멍하니 변기에 앉아 있다. 뒤를 닦기도 귀찮고, 물을 내리기도 귀찮다. 별 생각도 없이, 나는 자위를 시작한다. 다리를 벌리고 선 잡지의 여자 때문이 아니다. 말하자면 나는, 오히려 천장을 보고 있다. 형광등... 그렇다, 형광등이 보인다. 나는 흔든다. 나를... 흔든다. 회화를 그러거나 자수를 놓듯, 그리고 나는 사정을 한다. 그냥, 그뿐이다.

어떤, 이상한 나라의 지도 같은 얼룩이 흰 피부의 여자와, 모택동의 얼굴을 덮고 있다. 누르스름한, 혹은 푸르스름한 정액의 반도半島, 정충[각주:1]의 섬들을 바라다보 떡이나 지겠지, 나는 잡지를 덮어버린다. 물을 내리고 뒤를 닦는다. 소용돌이치며 사라지는 진회색의 물을 나는 말없이 지켜본다. 지끈, 머리가 아프다.

잔디란 애가 들고 온 것이었나? 아무튼 툭, 체크무늬의 백팩 옆에 잡지를 던져둔다. 배가 고프다. 현기증이 인다. 화장실의 불을 끄고 나는 잠시 주저앉는다. 물을 마신다. 미지근한 물은 약간 상한 듯, 아니... 아직은 괜찮은 듯하다. 나는 담배를 찾는다. 조심조심 여러 개의 종아리를 건너뛰어 더듬, 내가 누웠던 자리의 머리맡을 손으로 짚어본다. 있다. 어둠 속에서 지갑과 열쇠를 챙기고 이번엔 세 개의 머리를 살피며 지나온다. 툭. 조심을 한다고 했는데, 누군가의 머리가 발등에 부딪힌다. 부드럽다. 작고 부드러운 머리다. 분명 두 명의 여자 아이 중 하나일 것이다. 일단 밖으로 나가자. 담배에 불을 댕기며 나는 운동화를 신는다. 야광의 로고가 박힌 것이어서 신발을 찾는 일은 그닥 어렵지 않았다. 차갑고

기분 좋은 밤공기다.

거의 이틀째 먹은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느낌이다. 배가 고픈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딱히 뭔가를 먹고 싶은 것도 아니다. 깊이 연기를 들이쉬고, 나는 뱉는다. 지겹도록 봐온 밤의 풍경이다. 꽤나 널찍한 시멘트 바닥, 몇 개의 화분과 운동기구... 빨랫줄에 널린 셔츠와 옷가지들... 그리고 너머의... 어둠. 작은 변화가 있다면

지금 내 방에 누워 있는 세 구의 시신이 전부일 것이다. 독촉이라도 하듯, 다시 배가 고파온다. 난간 너머로 꽁초를 내던지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뭘 먹을까? 나는 일단 계단을 내려선다. 문을 잠가야지, 생각도 하지 않는다. 새벽이다. 이십 년도 더 된 오층 건물의 옥상을 찾는 것은 바람과, 전파가 전부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대개 무관심하고, 나는 익히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편의점의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비스킷을 먹고 있다. 우유를 몇 모금 마시다 나가서 토를 했고, 잠시 바람을 쐬고 난 다음 다시 편의점으로 돌아왔다. 비스킷엔 이렇다 할 맛이 없고, 아마도 그것이 내가 비스킷을 고른 이유일 것이다. 봉지의 절반가량을 비우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빅 데이>를 떠올린다. 여섯 명이 모였고, 그중 둘은 돌아갔으며 세 사람은 성공을... 그리고 나는 살아남았다. 이유는 알 수 없다. 효과가 분명한 약이라고, JD는 얘기했었다.
  1. 정충 [精蟲] [명사]<생물> =정자(精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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