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이 책의 문체대로 쓴 글이다.
-----------------------------------------
이책을 덮고 나서 나는 문체를 바꾸기로 했습니다. 예전의 나는 애매모호한 생각을 애매모호한 채로 둔 채 애매모호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을 비겁하다 생각했습니다. 어떻게든 생각을 정리한 뒤 단호한 문장으로, 명징하고 간결하게 표현하는 것이 글쟁이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문장이 언제나 뭐랄까 좀 서늘했죠.
하루키의 문장은 늘 주저주저합니다. 괄호도 '남발'한다 싶을 정도로 자주 사용하죠. 주저흔을 나타내기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문장이 아닌가, 이책의 중반부쯤 띵하고 깨달았습니다.
"문학(글쓰기)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는 정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래서 훌륭한 작가들은 정확한 문장을 쓴다. 문법적으로 틀린 데가 없는 문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는 문장을 말한다. 그러나 삶의 진실은 수학적 진리와는 달라서 100퍼센트 정확한 문장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문학은 언제나 '근사치'로만 존재하는 것이리라.(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27쪽)"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말을 빌리면 주저함과 애매함이 문장에 고스란히 드러난 하루키의 문장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문장인 셈입니다.
정확하게 쓰겠습니다.
애매할땐 애매하게,
주저할땐 주저흔을 남기면서,
거짓 단호함으로 약한 저를 감싸지 않으면서.
책 속의 한 문장>
*자기 객관화!!!!!!!!!!!!!!!!!!!!!!!!!!!!!!!!!!!!!!!!!!
'트집 잡힌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 어찌 됐건 고친다'는 것입니다. 비판을 수긍할 수 없더라도 어쨌든 지적받은 부분이 있으면 그곳을 처음부터 다시 고쳐 씁니다. 지적에 동의할 수 없는 경우에는 상대의 조언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고치기도 합니다. ... 읽은 사람이 어떤 부분에 대해 지적할 때, 지적의 방향성은 어찌 됐건, 거기에는 뭔가 문제가 내포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 부분에서 소설의 흐름이 많든 적든 턱턱 걸린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내가 할 일은 그 걸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 어떤 문장이든 반드시 개량의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 중요한 것은 뜯어고친다는 '행위 그 자체'입니다. '어떻게 수정하느냐'라는 방향성 따위는 오히려 이차적인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작가의 본능이나 직감은 논리성이 아니라 결심에 의해 좀 더 유효하게 이끌려 나옵니다. 숲을 몽둥이로 두드려 안에 숨은 새를 날아오르게 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어떤 몽둥이로, 어떤 식으로 두드리든, 그 결과에 큰 차이는 없습니다. 아무튼 새를 날아오르게 하면 그걸로 좋은 것입니다. 새들의 움직임의 역동성이 고정되어가던 시야를 뒤흔듭니다.(157~161쪽)
*'이를테면'의 세계...패러프레이징...모호함의 연쇄..그 속에서 열리는 공간
소설을 쓰는 것은 효율성이 떨어지는 일, '이를테면'을 수없이 반복하는 작업. 소설가는 개인적 테마를 다른 문맥으로 치환...'그건요, 이를 테면 이러저러한 것이에요'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치환 속에 불명료한 점,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으면 다시 그것에 대해 '그건요,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것이에요'라고 다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한없는 페러프레이즈의 연쇄지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소설가란 불필요한 것을 일부러 필요로 하는 인종'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23쪽)
*글은 왜 글쓴이를 치유하는가.. 인생이 푸성진 머리칼처럼 엉켜 잘라내지 않고선 답이 없겠다 싶을 때, 글은 그 머리카락들을 살살 달래는 빗질 같았다. 머리칼이 정돈되면 인생도 정돈되는 느낌이 (실제로 달라지는 건 없었겠지만) 들곤 했다.
모든 창작 행위에는 많든 적든 스스로를 보정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을 상대화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지금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형식에 맞추는 것을 통해, 살아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다양한 모순이나 뒤틀림, 일그러짐 등을 해소해나간다는 것입니다.
*사회의 몰락.. 한국 사회의 몰락이 떠올랐다. 정확한 진단
내가 어렸을 때는 사회 자체에 '발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개인과 제도가 서로 다투는 듯한 문제도 그 공간에 쭉쭉 흡수되어 그다지 큰 사회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사회 전체가 둥글둥글 굴러갔기 때문에 그 동력이 다양한 모순이나 욕구불만을 삼켜 들였습니다. 난처할 때 도망칠 수 있는 여지나 틈새 같은 것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도성장 시대도 끝나고 그런 피난 공간을 찾아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큰 흐름에 내맡기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식의 대략적인 해결 방법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습니다.
*행운에 관한 꽤 정확한 정의
행운이란 말하자면 무료 입장권 같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유전이나 금광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그걸 찾아내고 일단 손에 넣으면 그다음은 만사 오케이, 하며 안일하게 살아갈 수 있다, 라는 건 아닙니다.(197쪽)
*실감에 관하여
실감, 누구도 알 수 없는,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나만 아는 무엇에 대한 실제의 감각, 확신
*체력과 창의성의 관계..이것은 모든 직업인이 필독해야 합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뇌 내에서 태어나는 해마 뉴런의 수는 유산소운동을 통해 비약적으로 증가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새롭게 태어난 뉴런도 그대로 두면 28시간 뒤에는 별 쓸모도 없이 소멸해버립니다. 막 태어난 뉴런에 지적인 자극을 주면 그게 활성화해서 뇌 내의 네트워크와 이어져 신호 전달 커뮤니티의 유기적인 일부가 됩니다. 임기응변으로 사고를 전환하거나 비범한 창조력을 발휘하기가 쉬워지는 것이지요. 즉 육체적인 운동과 지적인 작업의 일상적인 조합은 작가가 행하는 종류의 창조적인 노동에는 매우 이상적인 영향을 끼치는 셈입니다. ... 정신이든 두뇌든 그건 결국 똑같이 우리 육체의 일부인 것입니다. 그리고 정신과 두뇌와 신체의 경계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다지 뚜렷하게 명확한 선으로 구분되는 게 아닙니다. (184, 188쪽)
*상상력은 기억...천재는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제임스 조이스는 '상상력이란 기억이다'라고 실로 간결하게 정의했습니다. 완전 정답입니다. 상상력이란 그야말로 맥락 없는 단편적인 기억의 조합을 말합니다. '유효하게 조합된 맥락 없는 기억'은 그 자체의 직관을 갖고 예견성을 갖게 됩니다.(125쪽)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헬스의 정석 (0) | 2017.02.12 |
---|---|
정확한 사랑의 실험 (2) | 2016.05.22 |
작성중/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 (0) | 2016.05.22 |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0) | 2016.04.10 |
일론 머스크, 미래의 설계자 (0) | 2015.11.08 |